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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스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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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랭스 대성당은 프랑스 랭스에 위치한 고딕 양식의 대성당으로, 프랑스 왕들의 대관식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5세기부터 여러 차례 재건을 거쳐 현재의 모습은 13세기에 완성되었으며, 서쪽 파사드의 조각, 특히 미소 짓는 천사상과 같은 조각상과 스테인드글라스가 유명하다. 프랑스 혁명과 제1차 세계 대전 중 큰 피해를 입었으나 복원되었으며, 1991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대성당 옆에는 대주교의 거처이자 대관식 연회 장소였던 타우 궁전이 있으며, 12세기부터 1825년까지 32명의 프랑스 왕이 이곳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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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스 대성당 - [지명]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정식 명칭랭스 노트르담 대성당
프랑스어 명칭Cathédrale Notre-Dame de Reims
위치프랑스 Place du Cardinal Luçon, 51100 Reims
종파로마 가톨릭교회
교구랭스 대교구
봉헌성모 마리아
건축
유형교회 건축
건축 양식고딕 건축
착공1211년
완공1275년
길이149.17m
면적6,650m²
탑 개수2개
탑 높이81m
역사
설립자알 수 없음
과거 주교알 수 없음
관련 인물클로비스 1세
중요 사건프랑스 왕의 대관식 장소
지정Monument Historique (1862년, 1920년)
세계유산 정보
등재 기준(i), (ii), (vi)
지정 연도1991년
ID601-001
부분노트르담 대성당, 옛 성 레미 수도원, 토 궁전, 랭스
추가 정보
건축가장 도르베, 장 르 루, 고셰 드 랭스, 베르나르 드 수아송
웹사이트http://www.cathedrale-reims.com/
대주교에리크 드 물랭-보포르
사제장-피에르 로랑
이미지
북동쪽에서 바라본 파사드
대성당 파사드 (북동쪽에서 촬영)

2. 역사

프랑크 왕국의 국왕 클로비스 1세가 랭스 주교 성 레미에게 기독교로 개종하는 세례를 받은 이래, 랭스 대성당은 역대 프랑스 국왕의 대관식이 거행되는 유서 깊은 장소가 되었다. 이 대성당은 샤르트르 대성당, 아미앵 대성당과 더불어 프랑스 고딕 건축의 대표적인 걸작으로 손꼽힌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의 폭격을 받아 불타는 대성당(1915)


현재의 대성당 건물은 1210년 화재로 소실된 이전 교회를 대체하기 위해 1211년 5월 6일부터 건축이 시작되었다. 건축 초기인 1233년부터 1236년 사이에는 과도한 세금 부담에 시달린 시민들이 공사를 주도하던 고위 성직자들에게 반란을 일으키는 사건도 있었으나, 공사는 계속 진행되어 13세기 말에는 서쪽 부분을 제외한 대부분이 완성되었다. 이후 백년 전쟁잉글랜드 군대의 포위(1359년-1360년) 등으로 잠시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지만, 14세기에는 서쪽 부분까지 완공되었다. 다만 파사드의 두 종탑은 각각 1445년(남쪽)과 1475년(북쪽)에 이르러서야 완공되었다. 백년 전쟁 시기에는 프랑스를 구한 영웅 잔 다르크가 샤를 7세와 함께 이곳을 방문하기도 했다.

랭스 대성당은 프랑스 혁명 시기에 혁명 세력에 의해 조각상 등을 중심으로 일부 파괴되는 수난을 겪었다. 이후 1875년 프랑스 국회는 복원을 위해 현재 가치로 약 8만유로의 예산을 투입하기로 결정하여 파괴된 조각상 대부분이 복원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4년부터 1918년까지 독일군의 지속적인 공습과 포격으로 인해 다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조각상과 스테인드 글라스의 절반 가량이 손실되었으며, 특히 1914년 9월 19일의 공습으로 발생한 화재는 지붕 전체를 태우며 대성당에 궤멸적인 타격을 입혔다.

전쟁이 끝난 후, 랭스 출신 건축가 앙리 드뇌의 주도로 대대적인 재건 작업이 이루어져 1938년에 다시 일반에 공개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의 상처가 깊었던 만큼, 일부 복구 작업은 오늘날까지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

2. 1. 초기 역사 (5세기 ~ 12세기)

갈리아의 레메스족(Remes) 부족이 살던 정착지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갈리아 전쟁 기록에서 두로코르토룸이라고 불렀다. 로마 제국 시대에 이 도시는 라인강 삼각주까지 이르는 속주의 수도였고, 서기 3세기에는 제2 벨기에 속주의 수도가 되었다. 최초의 기독교 교회는 초대 주교인 성 랭스의 식스투스에 의해 250년에서 300년 사이에 세워졌다.

5세기 초, 메로빙거 시대에 주교 랭스의 니카시우스는 대성당을 현재 위치로 옮겼다. 이곳은 원래 갈로-로마 문화 시대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지은 목욕탕 자리였다. 새 교회는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되었는데, 이는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성모 마리아의 위상을 높이기로 한 결정을 미리 반영한 것이었다. 이 새로운 대성당은 바깥은 사각형, 안은 원형 평면을 가졌으며 크기는 약 20m x 55m였다. 1990년대 발굴을 통해 현재 대성당 바로 아래에서 이 메로빙거 시대 교회의 세례당과 옛 구조물의 파편들이 발견되었다.

프랑크 왕국의 왕 클로비스 1세는 약 496년에 생 레미지우스 (성 레미) 주교에게 이곳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 사건은 이후 랭스에서 프랑스 왕들의 대관식이 열리는 오랜 전통의 시작이 되었다.

816년, 프랑크 왕국의 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경건왕 루이는 교황 스테파노 4세에 의해 랭스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이 대관식과 축하 행사를 통해 초기 대성당의 상태가 좋지 않고 규모가 작다는 점이 드러났다. 818년경부터 대주교 에보와 왕실 건축가 루모드는 오래된 도시 성벽의 돌을 사용하여 같은 자리에 더 큰 교회를 짓기 시작했다.

이 공사는 835년에 중단되었으나, 새로운 대주교 앵크마르가 황제 대머리 카를의 지원을 받아 다시 시작했다. 교회 내부는 도금, 모자이크, 회화, 조각, 태피스트리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862년 10월 18일, 황제가 참석한 가운데 앵크마르는 새 교회를 봉헌했다. 이 교회의 길이는 86m였고 두 개의 트란셉트를 가지고 있었다.

10세기 초에는 원래 교회 아래에 있던 고대 지하 묘지가 다시 발견되었다. 에리베우스 대주교는 이 지하 묘지를 정비하고 개조하여 성인 주교 레미지우스에게 다시 헌납했다. 대성당의 제단은 15세기까지도 이 지하 묘지 바로 위에 같은 자리를 지켰다.

976년부터 아달베로 대주교는 카롤링거 건축 양식의 대성당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아달베로의 제자인 역사가 리케루스는 당시 공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록했다.

"그는 입구에서 바실리카의 거의 4분의 1 지점까지, 맨 위까지 뻗어 있는 아케이드를 완전히 파괴하여, 전체 교회가 더 아름답게 꾸며지고 더 넓은 범위와 더 적합한 형태를 갖도록 했다 (...). 그는 황금 십자가의 주 제단을 장식하고 그것을 빛나는 격자로 감쌌다 (...). 그는 다양한 이야기가 묘사된 창문으로 같은 교회를 밝히고 천둥처럼 울리는 종을 부여했다."


프랑스 왕들이 즉위 시 성유를 바르는 데 사용했던 성유 병, 클로비스 1세가 이곳에서 세례를 받은 역사적 사실, 그리고 랭스 대주교의 정치적 영향력 덕분에 랭스는 프랑스 군주 대관식의 정규 장소가 되었다. 이 전통은 1027년 프랑스 앙리 1세의 대관식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위그 카페, 로베르 2세, 루이 6세, 요한 1세, 앙리 4세, 루이 18세, 루이 필리프 1세를 제외한 모든 프랑스 왕이 랭스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대성당에서는 다른 왕실 행사도 열렸다. 1051년 5월 19일, 프랑스 앙리 1세와 키예프의 안나가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131년에는 교황 인노첸시오 2세가 주재한 랭스 공의회에서 당시 왕이었던 루이 6세의 아들 프랑스 루이 7세에게 성유를 바르고 대관식을 거행했다.

12세기 무렵, 카롤링거 시대에 지어진 대성당은 삼손 드 모부아생 대주교(1140-1160)의 기준에는 너무 작다고 여겨졌다. 그는 기존의 본당과 익랑은 유지하면서 대성당의 양쪽 끝을 재건하고 확장했다. 그는 서쪽 정면과 인접한 탑을 허물고, 그 자리에 두 개의 대칭적인 측면 탑을 세웠는데, 이는 삼손 자신이 몇 년 전 참석했던 파리 외곽의 왕립 생 드니 대수도원을 모델로 한 것이었다. 새롭게 확장된 교회의 길이는 110m에 달했다. 동쪽 끝에는 더 큰 성가대석과 주보랑, 그리고 방사형 예배당들을 만들었다. 12세기 말, 랭스 대성당은 본당과 익랑은 여전히 카롤링거 양식이었지만, 후진과 정면은 초기 고딕 양식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2. 2. 고딕 대성당의 건설 (13세기 ~ 14세기)

1210년 5월 6일, 기존의 카롤링거 양식과 초기 고딕 양식이 혼합된 대성당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1년 후인 1211년 5월 6일, 오브리 대주교가 새로운 고딕 건축 양식 대성당의 체베에 첫 돌을 놓으며 재건축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대성당 공사는 표준화된 크기의 석재와 자재를 사용하여 각 부재를 현장에서 맞춤 제작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이례적으로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1221년 7월에는 대성당 동쪽 끝의 예배당 사용이 시작되었고, 1230년에는 서쪽 정면 작업이 시작되어 본당 건축이 거의 완료되었음을 시사했다.

그러나 1233년, 세금 및 법적 관할권 문제로 대성당 참사회와 시민들 사이에 오랫동안 지속된 갈등이 폭력적인 반란으로 비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여러 성직자가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고, 대성당 참사회는 도시를 떠나 교황령 아래에 두는 조치를 취했다. 이로 인해 모든 공공 예배와 성사가 금지되었고, 대성당 건축은 3년 동안 중단되었다. 프랑스 왕과 교황의 중재로 성직자들이 도시로 복귀하고 금지령이 해제된 1236년에야 공사가 재개되었으나, 이후 건설 속도는 더뎌졌다.

1241년에는 참사회 회원들이 성가대에서 모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압시스(apse)의 아치와 본당 동쪽 끝 다섯 개의 횡단 구획(stall이 위치한 곳)이 완성되었음을 의미한다. 본당 지붕은 1299년에야 완성되었고, 서쪽 파사드 작업은 1252년에 시작되어 포털은 1260년 이후에 완성되었다. 장미 창은 1275년에서 1280년 사이에, 상부 갤러리의 지붕은 1299년에 완성되었다. 트란셉트의 장미 창은 바 트레이서리(bar tracery)를 사용했지만 유리가 둥근 틀 안에 있는 고전 고딕과 후기 고딕의 혼합 양식을 보여주는 반면, 서쪽 파사드의 장미 창은 유리가 뾰족 아치 전체를 채우는 레이오난트(Rayonnant) 양식으로 발전된 형태를 보여준다.

13세기 화가 빌라르 드 온느쿠르가 그린 플라잉 버트레스 구조 스케치


랭스 대성당 내부 평면도


1275년 구조 작업이 완료될 때까지 대성당 건축을 이끈 연속적인 건축가들의 이름(장 도르베, 장르루, 랭스의 고셰, 베르나르 드 수아송)이 알려져 있다는 점은 특이하다. 이들의 이름과 작업 기간은 랭스 대성당 미로에 기록되어 있었으나, 이 미로는 1779년에 파괴되었다. 미로와 석공장의 명확한 연관성은 당시 건축가의 지위가 상승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증거로 여겨진다. 또한, 인근 생 니케즈 교회의 건축가 위그 리베르지에(Hugues Libergier, 1268년 사망)의 무덤에는 그가 학자 복장을 하고 교회 모형을 들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어, 건축가의 높아진 위상을 보여준다.

13세기 말 주요 구조가 완성된 후에도 작업은 계속되었다. 1317년 1월 9일에는 필리프 5세가 이곳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백년 전쟁 중인 1359년부터 1360년까지 랭스 공방전으로 도시가 영국군의 포위를 받았으나 함락되지는 않았고, 이로 인해 공사가 잠시 중단되기도 했다. 1380년에는 샤를 6세의 대관식이 거행되었고, 1388년 샤를 6세는 랭스에서 공의회를 열어 친정을 선포했다. 14세기 말까지 서쪽 부분을 포함한 대부분의 공사가 완료되었지만, 파사드의 탑과 같은 일부 요소는 15세기 이후에 완성되었다.

2. 3. 15세기 ~ 18세기

백년 전쟁아쟁쿠르 전투(1415년) 이후 랭스를 포함한 프랑스 북부 대부분이 잉글랜드에 점령되었다. 이 상황은 1429년 잔 다르크가 랭스를 탈환하면서 전환점을 맞이하였고, 덕분에 도팽 샤를은 1429년 7월 17일 랭스 대성당에서 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8]. 이는 백년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잔 다르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대성당 외부에는 그녀의 기마상이, 내부에는 또 다른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대성당의 파사드 부분 건설은 상대적으로 늦어져, 두 개의 종탑은 남쪽이 1445년, 북쪽이 1475년에 완공되었다.

1481년 7월 24일, 목재와 납으로 덮인 높은 플레쉬(첨탑)를 건설하던 인부들의 부주의로 화재가 발생했다. 이 화재로 트란셉트 위의 첨탑 골조 일부와 중앙 종탑, 지붕 기초 갤러리가 파괴되었고, 녹아내린 지붕의 납이 떨어지면서 추가적인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샤를 8세와 루이 12세가 재건 비용을 기부하고, 특히 가벨(소금세)에 대한 옥트루아(도시세 징수권)를 대성당에 부여하면서 복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감사의 표시로 새로운 지붕은 백합 문장과 왕가의 문장으로 장식되었다. 하지만 이 복구 작업은 1516년 첨탑이 완성되기 전에 중단되었다. 본당의 상부 갤러리는 1505년에 완성되었으나, 비용 문제로 트란셉트 위에 계획되었던 170m 높이의 종탑, 서쪽 파사드의 첨탑들, 트란셉트 양옆의 상부 탑 건설 등 나머지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프랑수아 1세 사후, 앙리 2세는 1547년 7월 25일 랭스 대성당에서 프랑스 왕으로 즉위했다. 이후에도 루이 13세(1610년 10월 17일), 루이 15세(1724년), 루이 16세(1775년) 등 여러 프랑스 왕들이 이곳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18세기에 대성당 내부의 첫 대대적인 개보수가 이루어졌다. 1741년부터 1749년까지 낮은 창문들과 중세 시대의 가구, 주제단, 성가대석, 성가대 칸막이 등이 당시의 신학적 요구와 취향에 맞춰 교체되었다. 정문의 조각상들도 복원되었다. 또한, 대성당 바닥에 있던 미로는 1779년에 파괴되었다.

1793년 프랑스 혁명 시기, 대성당은 폐쇄되어 한동안 곡물 창고로 사용되다가 이후 이성 숭배 사원으로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남아있던 가구와 장례 기념물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성유물함은 녹여 금으로 사용되었으며 종들은 녹여 대포 제작에 쓰였다. 군중들은 왕정을 상징하는 서쪽 정면 왕의 갤러리 조각상, 백합 문장, 왕실의 정의의 손 등을 망치로 부수고 불태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 시대의 조각상 대부분은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었다.

2. 4. 19세기 ~ 20세기

나폴레옹 몰락 후 프랑스 왕정이 복고되면서 랭스에서 왕의 대관식이 잠시 재개되었다. 1825년 샤를 10세가 랭스에서 대관식을 치른 마지막 프랑스 왕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통치는 파리에서 매우 인기가 없었고, 결국 7월 혁명으로 전복되었다. 뒤이어 왕위에 오른 입헌 군주 루이 필리프 1세는 랭스에서 대관식을 치르는 대신 파리 의회에서 선서했다.

19세기 후반에는 대대적인 복원 사업이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장 자크 아르뵈프의 지휘 아래 서쪽 정면의 박공과 조각상(1826-1830), 그리고 상부 갤러리, 창문, 탑(1845-1860)이 복원되었다. 1860년에는 외젠 비올레르 뒤크가 뒤를 이어 합창단 갤러리와 앱스를 원래 중세 모습에 가깝게 수정했다. 그의 후임 건축가인 외젠 밀레와 빅토르 르프리슈-로베르는 본당 갤러리를 13세기 고딕 양식으로 상상력을 발휘하여 다시 만들었다. 1888년부터는 드니 다르시와 폴 구가 역사적 건축 양식을 더욱 충실히 따르며, 특히 서쪽 장미 창 복원에 힘썼다.

한편, 랭스 대성당은 프랑스 혁명 당시 혼란 속에서 조각상을 중심으로 일부 파괴되었으나, 1875년 프랑스 국회는 복원을 위해 현재 가치로 약 8만유로를 투자하기로 결의했고, 조각상 대부분이 복원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4년부터 1918년까지 독일군의 공습과 포격으로 다시 큰 피해를 입었다. 조각상과 스테인드 글라스의 약 절반이 손실되었으며, 특히 1914년 9월 19일 공습으로 발생한 화재는 북쪽 탑에서 시작되어 지붕 전체로 번지면서 대성당은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전쟁이 끝난 후, 랭스 출신 건축가 앙리 드뇌의 주도로 재건 작업이 시작되어 1938년에 완료되었고 대성당은 다시 일반에 공개되었다. 하지만 일부 복구 작업은 현재까지도 진행 중이다.

3. 주요 사건 연표

wikitext

연도주요 사건
250-300년경성 랭스의 식스투스가 랭스 최초의 주교로 기록됨.
314년성 시포리안 성당 부지에 주교 베토스가 세운 성 사도 대성당 기록됨.
420년주교 랭스의 니카시우스가 현재 위치에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된 새로운 대성당 건립.
496년프랑크 왕국의 왕 클로비스 1세가 레미 주교에게 세례를 받음. 이는 이후 프랑스 군주 대관식 전통의 중요한 계기가 됨.
816년신성 로마 제국 황제 경건왕 루이가 교황 스테파노 4세에 의해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름.
818년경대주교 에보와 왕실 건축가 루모드가 기존 대성당 부지에 더 큰 규모의 교회 건설 시작.
848년새로운 대성당 건설 시작.
862년 10월 18일대주교 앵크마르가 황제 대머리 카를이 참석한 가운데 새 대성당 봉헌.
976년아달베로 대주교가 카롤링거 건축 양식의 대성당 확장 시작.
1027년프랑스 앙리 1세의 대관식을 시작으로 프랑스 왕들의 주요 대관식 장소로 자리 잡음.
1051년 5월 19일프랑스 앙리 1세와 키예프의 안나가 대성당에서 결혼.
1131년교황 인노첸시오 2세 주재 랭스 공의회에서 미래의 왕 프랑스 루이 7세에게 성유를 바르고 대관식을 거행.
1140-1160년삼손 대주교가 서쪽 정면과 성가대 재건 및 확장.
1208년오브리 드 엉베르 대주교가 새 대성당의 첫 번째 돌을 놓음.
1210년 5월 6일화재로 카롤링거-초기 고딕 양식의 대성당 소실.
1211년 5월 6일현재의 고딕 양식 대성당 건축 시작.
1233-1236년과도한 세금 문제로 인한 시민 반란으로 공사 3년간 중단.
1241년성가대, 앱스(후진), 본당(네이브) 동쪽 부분, 북쪽 포털, 트란셉트(익랑) 대부분 완공.
1252년새로운 서쪽 정면 부지 확보.
1275년대성당의 주요 구조 작업 완료. 대성당 건축을 이끈 네 명의 석공장(장 도르베, 장르루, 랭스의 고셰, 베르나르 드 수아송)의 이름과 작업 기간이 새겨진 미로가 바닥에 설치됨 (1779년 파괴).
1299년본당(네이브) 지붕 완공.
1300-1350년서쪽 정면의 왕의 갤러리 건설.
1317년 1월 9일필리프 5세 대관식 거행.
1359-1360년백년 전쟁 중 랭스 공방전. 영국군의 포위 공격을 받았으나 함락되지 않음.
1380년샤를 6세 대관식 거행.
1429년 7월 17일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샤를 7세가 대관식을 치름.
1430-1460년서쪽 정면 상부 타워 건설.
1481년 7월 24일화재로 지붕과 트랜셉트(익랑) 위의 첨탑 소실.
1504년화재 피해 복구 완료.
1547년 7월 25일앙리 2세 대관식 거행.
1580년허리케인으로 남쪽 장미 창문 파괴.
1611년서쪽 포털 복원.
1737년서쪽 파사드와 조각상 수리.
1741–1749년대대적인 내부 개조. 중세 가구들이 제거되고 바로크/고전주의 양식으로 재장식됨.
1793년프랑스 혁명 시기, 대성당이 폐쇄되고 내부 유물과 장식 다수가 파괴되거나 약탈당함. 한때 사료 창고, 이후 이성 숭배 사원으로 사용됨.
1825년샤를 10세 대관식 거행 (랭스에서의 마지막 왕 대관식).
1825–1830년서쪽 포털 복원.
1845–1860년상부 교회와 탑 복원.
1850–1879년건축가 외젠 비올레르 뒤크의 주도로 앱스(후진) 복원.
1875–1880년본당(네이브) 갤러리 복원.
1914–1918년제1차 세계 대전독일군의 포격으로 300회 이상 피격되어 심각하게 손상됨. 특히 1914년 9월 화재로 지붕 소실.
1918–1937년전쟁 피해 복구 작업 진행 및 새로운 고고학적 발굴 실시.
1938년복구 작업 완료 후 일반에 다시 공개됨.
1962년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과 콘라트 아데나워 서독 총리가 대성당에서 만나 프랑스-독일 화해를 기념함.
1986년북쪽 포털 복원 완료.
1996년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하여 클로비스 1세 세례 1500주년을 기념함.
2011년서쪽 포털 복원 시작.
2014년서쪽 장미 창문 복원 시작.


4. 건축 양식

랭스 대성당은 프랑스 고딕 건축의 정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축물 중 하나이다. 전체적으로 리브 볼트 천장과 이를 지지하는 플라잉 버트레스 시스템 등 전형적인 고딕 양식의 구조를 따르면서도, 여러 면에서 독창적인 특징을 나타낸다.[6]

특히 외관과 내관을 장식하는 풍부하고 정교한 조각은 랭스 대성당의 중요한 특징이다. 동시대의 샤르트르 대성당과 비교했을 때, 랭스 대성당의 조각상들은 훨씬 자유로운 자세와 풍부한 감정 표현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받는다.[6] 서쪽 정면은 이례적인 양식적 통일성을 갖추고 있으며, 정문 위 팀파눔 자리에 장미 창을 배치한 독특한 구성을 보인다.[6] 또한, 서쪽 정면 내벽에도 다른 고딕 성당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대규모 조각 벽이 조성되어 있다.

내부 구조에서는 샤르트르 대성당에서 확립된 고전기 고딕 양식의 3층 구성(아케이드, 트리포리움, 클리어스토리)을 계승하면서도[6], 클리어스토리에 트레이서리 기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스테인드글라스의 면적을 극대화했다.[6] 이 트레이서리 기법은 이후 고딕 건축에서 창문 디자인의 표준적인 요소로 자리 잡게 된다.[6] 북쪽 트란셉트의 장미 창은 초기 레요낭 고딕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예시이다. 내진의 평면은 초기 고딕의 전통을 따라 반원형으로 구성되었다.[6]

성당 내부는 대관식 등 많은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 신랑이 넓게 설계되었으며, 다른 성당에 비해 내부가 매우 밝은 편인데, 이는 18세기에 일부 스테인드글라스를 투명한 유리로 교체했기 때문이다.[6]

4. 1. 외관

랭스 대성당의 외관은 동서로 길게 뻗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수직성을 강하게 강조하는 전형적인 고딕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대성당의 파사드를 비롯한 외벽은 수많은 조각으로 매우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동시대 다른 대성당들과 비교했을 때에도 그 규모와 예술적 완성도 면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특히 조각상들은 이전 샤르트르 대성당 등에서 보이는 다소 경직된 모습과 달리, 훨씬 자유로운 자세와 풍부한 감정 표현을 보여준다.

구조적으로는 리브 볼트 천장과 이를 외부에서 지지하는 플라잉 버트레스 시스템을 사용하여 높고 넓은 내부 공간을 가능하게 했다. 서쪽 파사드의 경우, 일반적인 고딕 성당과 달리 정문 위 팀파눔이 있어야 할 위치에도 장미 창이 배치된 독특한 구성을 보인다. 대신 팀파눔에 표현될 법한 종교적 주제들은 창 위쪽의 삼각형 박공 부분 조각으로 옮겨졌다.

서쪽 정면 중앙 출입구는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되었고, 북쪽 익랑(트랜셉트) 출입구는 최후의 심판 등을 주제로 다룬다. 외관 전체에 걸쳐 성경의 이야기와 성인들의 모습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으며, 특히 서쪽 정면의 '미소 짓는 천사'[6]와 상단의 '왕들의 갤러리' 조각군이 유명하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의 포격으로 인해 많은 외관 조각들이 심하게 손상되었다. 이후 복원 과정에서 일부 중요한 원본 조각들은 파손을 막기 위해 인접한 타우 궁전으로 옮겨져 보존 및 전시되고 있으며, 현재 대성당 외벽에 있는 것은 복제품인 경우가 많다.

4. 1. 1. 서쪽 파사드

랭스 대성당의 정문인 서쪽 정면은 특히 왕족을 찬양하는 요소가 두드러진다. 대부분 같은 시기에 완공되어 이례적인 양식의 통일성을 보여준다. 두 개의 동일한 높이의 탑과 본당으로 들어가는 세 개의 문으로 조화롭고 균형 잡힌 모습을 갖추고 있다. 많은 조각상이 있는 아치 모양의 문 현관은 주요 벽면에서 앞으로 튀어나와 있다.

중앙 포털 위, 약간 뒤쪽에는 높은 아치형 창문이 있고, 그 위 고창 높이에는 큰 장미 창이 자리한다. 장미 창은 앞으로 튀어나온 뾰족한 캐노피 아래 조각상들과 함께 배치되어 있다. 장미 창 위에는 '왕들의 갤러리'가 있는데, 이는 프랑크 왕국의 최초 기독교 왕인 클로비스 1세가 중앙에 있고, 그의 오른쪽에 클로틸드, 왼쪽에 생 레미를 포함한 4.5m 높이의 조각상 56개로 구성된다. 양쪽의 두 종탑은 원래 첨탑을 세워 본당보다 3배 더 높게 만들 계획이었으나, 실제로 세워지지는 않았다.

4. 1. 2. 서쪽 포털

서쪽 정면에 위치한 세 개의 출입구(포털)에는 문맹 신자들에게 성경의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정교한 조각 프로그램이 포함되어 있다.

중앙 출입구는 대성당의 주보성인인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되었다. 출입구 상단 박공 아래의 주요 장면은 마리아로 표현된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 사이의 상징적인 결혼을 보여준다. 마리아는 출입구 중앙 기둥의 조각상이기도 하다.

남쪽 출입구의 조각상은 최후의 심판과 요한 계시록을 묘사한다. 이 두 주제를 함께 다룬 것은 주요 고딕 양식 대성당 중 랭스 대성당이 유일하다. 출입구 상단 박공 아래에는 심판을 내리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있고, 천사들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징하는 도구들을 들고 있다. 다른 조각상들은 묵시록의 네 기사, 수많은 천사들, 그리고 악덕과 미덕을 의인화한 상징들을 나타낸다.

북쪽 출입구의 조각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형을 주제로 하며, 이 장면은 출입구 상단 박공 아래에 묘사되어 있다. 다른 장면으로는 부활예수의 승천이 있다. 북쪽 출입구 왼편에는 랭스 대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조각 중 하나인 미소 짓는 천사 가브리엘과 마리아상이 있다. 이 천사상은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손상을 입었으나, 이후 복원되어 제자리에 다시 설치되었다.

4. 1. 3. 탑

12세기 삼손 드 모부아생 대주교(1140-1160) 시기, 기존 대성당 서쪽 정면과 인접 탑을 허물고 파리 외곽의 왕립 생 드니 대수도원을 본떠 두 개의 대칭되는 측면 탑을 지었다. 1481년 화재로 인해 원래의 지붕과 첨탑이 파괴되었으며, 익랑(트랜셉트) 측면에 있던 네 개의 탑 중 지붕 높이 이상으로 남아있는 것은 없다.

19세기 후반 복원 사업 당시, 1845년부터 1860년 사이에 상부 갤러리, 창문과 함께 탑도 복원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4년 9월에는 북쪽 탑에 잠시 흰 깃발이 게양되기도 했다. 1955년에는 조각가 조르주 소피크가 북쪽 탑을 위한 성 토마스 조각상을 제작했다.

남서쪽 탑에는 두 개의 큰 종이 있다.

  • 첫 번째 부르동(bourdon) 종: 1570년 로렌 추기경 샤를이 기증한 것으로, 직경 2.46m, 무게 10ton에 달한다.
  • 두 번째 부르동 종: 1849년에 만들어졌으며, 직경 2.2m, 무게 7ton이다.


4. 1. 4. 트란셉트

북쪽 익랑은 서쪽 정면과 유사하게 조각으로 장식된 세 개의 출입구를 가지고 있다. 이 출입구들은 각각 성모 마리아(왼쪽), 기독교 성인(가운데), 최후의 심판(오른쪽)을 주제로 헌정되었다. 출입구 위쪽으로는 세 개의 작은 장미 창문이 배치되어 있으며, 그 위에는 조각으로 가득 찬 아케이드로 덮인 큰 장미 창문이 자리 잡고 있다. 북쪽의 큰 장미 창문은 초기 트레이서리 기법이 사용된 중요한 예시로, 얇은 석조 세살창이 스테인드글라스 창살을 나누고 있다. 중앙의 원형 창(눈)에서 12개의 석조 세살창이 바깥쪽으로 뻗어 나가는 형태는 레요낭 고딕 건축의 주요 특징 중 하나이다. 이 창문 위에는 조각으로 채워진 아치가 있으며, 서쪽 정면의 왕들의 갤러리처럼 7개의 사도와 예언자 조각상이 배치되어 있다. 익랑의 가장 높은 부분에는 수태고지 장면을 묘사한 삼각 박공이 있으며, 이 박공은 후기 고딕 양식인 플람보이앙 양식의 특징인 크로셰와 정교한 장식들로 꾸며져 있다. 북쪽 익랑의 양쪽에는 가늘고 긴 플라잉 버트레스가 세워져 있고, 그 위에는 후기 고딕 양식의 크로셰로 장식된 첨탑 아래 왕들의 조각상이 있는 날씬한 감실이 있다.

남쪽 익랑은 북쪽 익랑과 전체적인 구조는 비슷하지만, 출입구가 없다는 점이 다르다. 대신, 가느다란 기둥으로 나뉜 세 개의 좁은 뾰족 창문 그룹이 있고, 그 위로 작은 장미 창문이 있으며, 다시 그 위에 큰 장미 창문이 위치한다. 남쪽의 큰 장미 창문은 1580년 허리케인으로 인해 파괴된 후, 기존보다 단순한 디자인의 트레이서리로 교체되었다. 창문 위쪽의 조각상 갤러리는 19세기에 대대적인 복원을 거쳤다. 꼭대기의 삼각 박공은 플람보이앙 양식으로 만들어졌으며, 성모 승천을 묘사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박공의 가장 높은 지점에는 활을 든 고대 로마의 궁수, 즉 궁수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북쪽 익랑과 남쪽 익랑 비교'''
특징북쪽 익랑남쪽 익랑
3개 (성모 마리아, 기독교 성인, 최후의 심판 주제) | 없음 (대신 3개의 좁은 뾰족 창문 그룹)
3개의 작은 장미 창문 (출입구 위) | 작은 장미 창문 (뾰족 창문 그룹 위)
초기 트레이서리, 레요낭 고딕 특징 | 1580년 파괴 후 단순한 디자인으로 교체
7개의 사도와 예언자 조각상 | 조각상 갤러리 (19세기 대대적 복원)
수태고지 묘사, 플람보이앙 양식 | 성모 승천 묘사, 플람보이앙 양식, 꼭대기에 궁수 조각상
가늘고 긴 플라잉 버트레스, 왕 조각상 감실 | -


4. 1. 5. 벽과 버팀벽

긴 회랑의 북쪽과 남쪽 벽은 각 측면에 11개의 플라잉 버트레스로 지지된다. 이 버팀벽들은 천장 아치가 바깥쪽으로 미는 힘에 대응하여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한다. 덕분에 높은 천장과 얇은 벽, 그리고 커다란 창문을 만들어 회랑 내부에 풍부한 빛이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각 버트레스는 이중 아치 구조로 되어 있으며, 튼튼한 기둥에서 시작하여 위쪽 벽으로 힘을 전달한다.

버트레스 위쪽에는 조각상으로 장식된 가늘고 뾰족한 첨탑이 있는 작은 구조물이 덮여 있다. 이 조각상들은 버트레스에 추가적인 무게를 실어 구조적 안정성을 높이는 동시에, 아치 구조를 시각적으로 가려주며 대성당 상층부의 다른 장식들과 조화를 이루는 역할을 한다. 버트레스에는 또 다른 중요한 기능이 있는데, 아치 부분에 좁은 수로(채널)가 파여 있어 빗물이 이 길을 따라 흘러 조각된 가고일의 입을 통해 건물 바깥으로 배출되도록 설계되었다.

1481년 화재 이후에는 윗벽에 아치, 첨탑, 세 잎 모양(삼엽) 로제트, 박공 등으로 이루어진 장식적인 맹인 갤러리(blind gallery)가 추가되었다. 이 구조물은 꼭대기까지 16m 높이로 솟아 있는 지붕의 기단을 가리는 역할을 한다. 지붕 꼭대기는 금박을 입힌 플뢰르 드 리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4. 1. 6. 압스

압스(apse)는 대성당의 동쪽 끝 부분으로, 끝에는 하나의 축방향 예배당과 4개의 방사형 예배당이 자리 잡고 있다. 압스의 외관은 아케이드, 첨탑, 뾰족탑, 그리고 풍부한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이 조각품들 대부분은 19세기에 비올레르뒤크가 추가한 것이다.

성가대석 위에는 가늘고 납으로 덮인 목재 플레쉬(뾰족탑)가 18m 높이로 솟아 있다. 이 플레쉬는 15세기에 처음 만들어진 후, 1920년대에 다시 재건되었다.

4. 2. 내관

성당 내부는 길이 138.75m, 폭 30m, 중심 높이는 38m에 이르는 광대한 공간이다. 대관식 참가자를 많이 수용할 수 있도록 신랑이 넓게 설계되었다. 다른 고딕 건축 성당과 비교하여 내부가 매우 밝다는 특징이 있는데, 이는 18세기에 성당 내부의 촛불 사용을 줄이기 위해 일부 스테인드글라스를 투명한 유리로 교체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진 가장 안쪽에 1974년 설치된 마르크 샤갈의 작품을 포함한 스테인드글라스는 여전히 중요한 볼거리이다. 또한, 이 지역 특산품인 샴페인의 제조 과정을 묘사한 스테인드글라스는 샴페인 제조업자들이 기증한 것이다.

내부 구조는 샤르트르 대성당에서 확립된 고전기 고딕 양식의 요소를 계승하면서도, 더 높은 첨두 아치를 사용하여 수직성을 강조했다. 피리에 칸토네(원통형 기둥에 4개의 작은 기둥이 붙은 형태)로 지지되는 높은 아케이드, 트리포리움(아케이드와 높은 창 사이의 좁은 갤러리), 그리고 클리어스토리(높은 창문 부분)로 이루어진 3층 구성과 4분할 리브 볼트 천장이 특징이다. 특히 랭스 대성당에서는 클리어스토리에 새로운 형식인 트레이서리(창을 장식하는 돌 조각 틀)를 도입하여 벽체를 거의 없애고 스테인드글라스의 면적을 크게 늘렸다. 이 트레이서리 양식은 이후 고딕 양식 창문의 표준처럼 자리 잡게 되었다. 내진은 초기 고딕 양식의 전통을 따라 반원형 평면을 유지하며 신랑과 부드럽게 연결된다.

4. 2. 1. 서쪽 벽 내부

랭스 대성당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다른 고딕 양식 대성당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서쪽 정면 내부의 조각 벽이다. 일부 조각상, 특히 문 주변의 조각상은 1914년 교회 폭격 이후 화재로 심하게 훼손되었지만, 벽은 실질적으로 복원되었다. 일부 조각품은 서쪽 정면에 묘사된 요한 계시록과 같은 성경 이야기를 이어가며, 다른 주제는 내부에서만 발견된다. 일부 장면은 성경적 사건을 더 최근의 역사적 사건과 연결한다. 벽은 세례자 요한에 의한 그리스도의 세례를 묘사하며, 이는 성 레미기우스에 의한 클로비스의 세례와 평행을 이룬다. 특히 성 니카시우스와 같은 지역 성인에게 주의를 기울인다.

유명한 장면 중 하나는 기사의 성찬식이다. 이 장면에서는 중세 기사의 갑옷을 입은 구약성서의 족장 아브라함이 제사장 왕 멜기세덱으로부터 빵과 포도주를 제공받고 있으며, 이는 신약성서의 성찬례를 예고한다.

4. 2. 2. 본당

본당은 교회의 중심 부분으로 서쪽 끝에서부터 트란셉트까지 뻗어 있으며, 일반 신자들이 예배를 드리는 곳이다. 본당은 교회 길이의 약 절반을 차지하며, 뛰어난 길이와 양식의 통일성을 지닌다. 인접한 트란셉트와 앱스보다 약간 좁다. 바깥쪽의 플라잉 버트레스로 보강된 새롭고 더 강력한 4분할 리브 볼트를 사용하여 높이를 확보했다. 4분할 볼트는 또한 생스 대성당이나 노트르담 대성당과 같은 초기 고딕 양식 교회에서 볼 수 있는 지주 교호 대신 동일한 기둥의 아케이드를 사용할 수 있게 하여 외관에 더 큰 통일성을 부여했다.

교회의 고도(elevation)는 1190년대 초 수아송 대성당에서 도입된 모델을 따라 3개 구역으로 나뉘었다. 1층에는 높은 아케이드가 있고, 그 위에는 트리포리움이라고 불리는 더 좁은 갤러리가 있으며, 그 위에는 갤러리와 높이가 같은 높은 창문이 있다. 랭스는 이 통일성과 단순성을 샤르트르 대성당에서 처음 도입된 본당의 엄청난 크기와 규모와 결합했다. 건축가들은 샤르트르에서 또 다른 요소를 채택했다. 아케이드의 기둥은 기둥 주위에 모여 있는 작은 원주 군으로 구성되어 볼트의 높은 아치로 극적으로 상승했다. 작은 원주의 여러 줄은 높이 감을 크게 강조했다. 기둥의 머리 부분은 또 다른 랭스 고유의 특징으로, 섬세한 꽃과 식물 조각으로 구성되었으며, 상상의 생물로 장식된 곳도 있다.

4. 2. 3. 트란셉트 내부

트란셉트는 성당의 본당과 성가대석 사이에 위치한 구획으로, 건물의 북쪽과 남쪽으로 뻗어 있다. 트란셉트는 원래 4개의 탑과 더 높은 중앙 탑을 가질 의도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본당보다 더 넓고 높다. 트란셉트 끝에 있는 4개의 탑은 시작되었지만 지붕선 위로는 완성되지 않았다. 트란셉트에는 원래 중앙 탑을 지지하도록 설계된 4개의 큰 기둥이 있다.

트란셉트는 특히 프랑스 왕의 대관식에 사용되었다. 중세 시대에는 기념비적인 로즈 스크린(Jubé) 또는 '쥐베'가 교회의 이 부분을 본당과 분리했다. 일반 성직자를 위한 스톨은 트란셉트 바로 서쪽에 있는 본당의 세 구획에 위치해 있었고, 트란셉트 바로 동쪽 지역은 고위 성직자의 의식과 축제를 위해 사용되었다.

성당의 오르간은 트란셉트 북쪽 벽, 장미 창 바로 아래에 설치되어 있다.

트란셉트에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그리오트(griotte)' 또는 붉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주 제단이 있다. 이 제단은 1747년에 만들어져 제1차 세계 대전의 폭격으로 파괴된 원래 제단의 복제품이다.

남쪽 트란셉트의 묵주 예배당에 있는 르네상스 시대의 후면 제단화(Retable)는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성모 마리아의 무릎에 있는 그리스도의 시신 조각과 사도, 성 요한, 성 막달레나, 그리고 후면 제단화의 기증자인 정경(Canon) 그랑드라울(Grandraul)의 조각상으로 채워져 있다. 이 작품은 1541년 랭스 조각가 피에르 자크(Pierre Jacques)가 제작했다.

북쪽 트란셉트의 북서쪽 벽에는 14세기에 제작된 중세 시대의 시계가 있다. 시계는 정교한 장식, 박공, 조각된 천사들로 이루어진 교회의 파사드 형태를 하고 있다. 정각이 되면 계절, 달의 위상, 그리고 동방 박사를 나타내는 일련의 인물들이 시계의 문에서 나타나고 사라진다. 이는 이러한 종류의 기계식 시계 중 가장 오래된 사례 중 하나이다.

트란셉트의 또 다른 특이한 특징은 남쪽에 있는 예배당의 바닥이다. 여기에는 1845년 대주교 궁전의 바닥에서 발견되어 현재 위치로 옮겨진 갈로-로마 시대의 모자이크가 포함되어 있다.

4. 2. 4. 성가대석과 예배당

성직자들을 위해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대성당의 공간인 성가대석은 신랑보다 훨씬 짧지만 더 넓고 높다. 동쪽 끝에는 5개의 방사형 예배당으로 통하는 이중 주보랑 또는 통로가 특징이다. 장식용 격자 울타리가 주보랑을 성가대석과 제단에서 분리한다. 주보랑 주변의 기둥은 거대한 단일 기둥으로, 풍부하게 장식된 주두와 클러스터형 기둥이 혼합되어 신랑에서 발견된 것과 동일한 양식을 이어간다. 주보랑의 극적인 아치형 볼트는 기둥에서 직접 솟아 있다.

동쪽 끝에 있는 5개의 예배당은 말굽 모양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외부에 있는 거대한 지지 버트레스 사이에 배치되어 있다. 중심 축에 있는 예배당이 가장 길며, 추가적인 천장 볼트가 그 앞에 있다. 샤를 안투안 드 라 로슈-아이몽 추기경 대주교 치하에서 1763년에서 1777년 사이에 압시스 예배당의 가구와 장식이 이루어졌다. 대성당에서 샤를 6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던 잔 다르크 성녀를 기리는 예배당에는 깃발을 든 완전 무장한 그녀의 조각상이 있다. 이 조각상은 1901년 조각가 프로스페르 데피네가 제작했다.

4. 2. 5. 오르간

랭스 대성당의 원래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은 15세기에 만들어졌으나, 1481년 화재로 대부분 파괴되었다. 오르간 케이스는 1487년에 다시 만들어졌고, 1647년에 또 한 번 재건되었다. 이 웅장한 오르간은 북쪽 익랑의 장미 창 바로 아래에 자리 잡고 있으며, 축복을 내리는 그리스도 조각상과 트럼펫을 연주하는 두 천사 조각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조각된 패널과 기둥이 있는 목공예품의 하단 부분은 18세기에 제작되었다.[4]

이 오르간은 제1차 세계 대전 때 다시 피해를 입었으나, 이후 복원되어 1938년에 봉헌되었다. 현재 프랑스에서 다섯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하며, 6,600개의 파이프와 85개의 스톱(독특한 소리를 내는 장치), 각각 61개의 음을 가진 4개의 건반, 그리고 32개의 풋 페달을 갖추고 있다. 콘서트에도 자주 사용된다.

1927년에는 작은 오르간이 성가대석에 설치되었다.[5]

5. 스테인드 글라스

랭스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중세 시대의 원본부터 마르크 샤갈과 같은 현대 작가들의 작품까지 다양한 시대를 아우른다. 서쪽 파사드의 장미 창, 네이브 상단 창, 트란셉트의 창세기 창과 지역 특색을 담은 창, 축 방향 예배당의 현대 작품 등은 성서 이야기, 프랑스 왕들의 대관식, 지역 역사 등 다채로운 주제를 담고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상당 부분 파괴되었으나, 이후 복원과 새로운 제작을 통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각 부분의 상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에서 다룬다.

5. 1. 서쪽 파사드 내부

서쪽 정면 내부에는 원래의 스테인드글라스의 상당 부분이 남아 있지만, 여러 차례 복원을 거쳤다. 서쪽 장미창 중앙에는 성모 승천이 묘사되어 있다. 이 창은 정면 외부에 조각된 성모 마리아의 대관 장면을 보완한다. 창의 메달리온 유리 원반은 중앙에서 바깥쪽으로 12사도, 천사 음악가, 구약의 왕과 예언자를 나타낸다.

장미창 바로 아래, 트리포리움의 칸에 있는 창문은 프랑스 왕들의 대관식을 묘사하며, 이는 정면의 왕들의 갤러리에 해당하는 스테인드글라스이다.

서쪽 포털의 창문은 더 현대적이다. 중앙 포털 위의 작은 장미창은 1938년 자크 시몽이 제작했으며, 성모 마리아와 관련된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측면 팀파눔의 유리는 1959년에 제작되었으며, 예수의 생애 장면을 담고 있다.

5. 2. 본당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랭스 대성당의 네이브(신랑) 상단 창문들은 거의 모든 원래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보존하고 있었다. 총 36개의 창문에는 각각 하단에 주교가, 상단에는 프랑스 왕이 묘사되어 있었다. 왕들의 머리 위로 유리창에 그려진 아케이드는 천사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이는 왕들이 천국의 지상 대표임을 암시했다. 네이브의 8구역부터 11구역까지, 트란셉트(익랑)와 가장 가까운 두 개의 만(bay)에 위치하며 트란셉트 탑의 보호를 받은 원래 창문 중 단 4개만이 온전하게 살아남았다. 나머지 창문들은 중세 및 현대의 유리로 재현되었다.

5. 3. 트란셉트

트란셉트 북쪽의 장미 창은 성서의 창세기 창조 이야기를 묘사하며, 13세기에 만들어진 원래의 유리창 대부분이 그대로 남아 있다. 창의 중앙에는 창조주 하나님이 있으며, 이는 트란셉트 외관의 조각 주제와도 일치한다. 창 안에 그려진 성모 마리아는 새로운 이브로 묘사된다.

트란셉트 상부 창들은 대부분 흰색의 그리자유 유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중 상당수가 13세기에 제작되었다. 이 창들은 왕의 대관식이 열리는 대성당 트란셉트에 최대한 많은 빛이 들어오도록 설계되었다.

생 레미 예배당에 있는 트란셉트 남쪽 정면의 아래쪽 창들은 이 지역만의 독특한 주제를 담고 있다. 프랑스 와인 산업 역사에서 돔 페리뇽 수도사의 역할과 샴페인 및 다른 지역 와인 제조 과정을 기념하는 내용이다. 이 창들은 1950년대에 자크 시몽이 제작했다. 또한, 트란셉트의 만(bay)과 성가대 오른쪽 두 예배당에서는 또 다른 독특한 현대식 창문들을 볼 수 있다. 이 창문들은 1961년부터 브리지트 시몽이 구상하고 그린 추상적인 패턴의 그리자유 또는 흰색 유리창이다.

5. 4. 성가대석과 예배당 창문

성가대석의 높은 창문 중 일부는 13세기 원본 유리를 포함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심하게 복원되거나 재조립된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성가대 축 방향 예배당에 위치한 앙리 드 브렌 대주교를 묘사한 창문을 들 수 있다.

대성당에서 가장 잘 알려진 창문 중 일부는 현대 작품으로, 대성당 동쪽 끝 축 방향 예배당에 있다. 이 창문들은 유리 예술가 샤를 마르크(Charles Marq)와 협력하여 마르크 샤갈이 제작한 세 개의 창문이다. 이 창문들은 이새의 나무(예수의 계보), 구약신약, 그리고 '랭스의 그랑드 외르'(Grandes Heures de Reims|랭스의 그랑드 외르프랑스어)를 주제로 하고 있다.

6. 주교 궁전과 보물

타우 궁전으로 알려진 주교 궁전은 랭스 대성당의 앱스 남쪽에 인접해 있으며, 대주교의 거처이자 프랑스 국왕의 대관식 연회 장소로 사용되었다. 대성당은 또한 성유물을 비롯한 중요한 보물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으며, 이 중 일부는 타우 궁전에 전시된다.

6. 1. 타우 궁전

타우 궁전은 랭스 대성당 앱스(제단 뒤 반원형 공간) 남쪽에 인접해 있다. 이곳은 대주교의 거처였으며, 프랑스 국왕의 대관식 후 축하 연회가 열리는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주교 궁전에는 대성당 바로 옆에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자체 예배당이 있다. 이 예배당은 부속 통로가 없고 3층 구조이며, 키가 큰 창문이 특징이다. 장식은 인접한 대성당보다 덜 화려하며, 이전에는 대주교의 지위를 상징하는 자체 플레슈(첨탑)가 있었다. 인접한 주거 공간은 원래 플랑보이앙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건축가 로베르 드 코트에 의해 1686년부터 1693년 사이에 대대적으로 재건되었다. 재건을 통해 정면 위 삼각 박공과 기념비적인 이중 계단을 갖춘 보다 고전적인 스타일로 바뀌었다. 이 건물 상층부에는 대관식 연회에 사용되는 홀이 있다.

대성당 미술 컬렉션에는 매우 훌륭한 태피스트리 컬렉션이 포함되어 있다. 이 태피스트리들은 이전에는 대성당 합창단에 걸려 있었지만, 현재는 여름에는 대성당 통로에, 나머지 기간에는 타우 궁전에 전시된다.

  • 플랑드르에서 제작된 두 개의 태피스트리는 클로비스의 생애를 묘사하며, 1573년 로렌 추기경 샤를이 더 큰 세트의 일부로 대성당에 기증했다.
  • 다른 태피스트리 세트는 1530년 프랑수아 1세 시대의 대주교였던 로베르 드 레논쿠르가 기증한 것이다. 이들은 현지에서 제작되었거나 플랑드르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성모 마리아의 생애와 그녀의 역할이 구약성서에서 어떻게 예시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대성당 보물에는 중요한 귀중품 컬렉션, 특히 성유물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중 일부는 대관식에 사용되었거나 프랑스 군주가 대관식 때 기증한 것이다. 여기에는 다음이 포함된다.

  • 성스러운 앰풀라 (Sainte Ampoule|생트 앙풀프랑스어): 프랑스 왕이 기름 부음을 받은 고대 성유물의 후계자이다. 프랑스 혁명 동안 파괴되었지만, 그 조각은 현재의 플라스크에 보존되어 있다.
  • 샤를마뉴의 탈리스만 (12세기): 진실된 십자가의 단편으로 추정되는 것을 포함하며, 사파이어, , 에메랄드, 진주로 장식되어 있다.
  • 생 레미의 성배: 클로비스의 대관식에 사용된 컵이라고 전해지며, 이후 대관식에도 사용되었다. 이는 12세기 컵으로 19세기에 진주와 보석으로 장식되었다.


6. 2. 대성당 보물

대성당 미술 컬렉션에는 매우 훌륭한 태피스트리 컬렉션이 포함되어 있다. 이 태피스트리들은 과거 대성당 합창단에 걸려 있었으나, 현재는 여름에는 대성당 통로에, 나머지 기간에는 타우 궁전에 전시된다.

플랑드르에서 제작된 두 개의 태피스트리는 클로비스의 생애 중 주요 장면들을 묘사한다. 이 작품들은 1573년 로렌 추기경 샤를이 더 큰 세트의 일부로 대성당에 기증한 것이다. 또 다른 태피스트리 세트는 1530년, 프랑수아 1세 (1515–1547) 시대의 대주교였던 로베르 드 레논쿠르가 기증했다. 이 태피스트리들은 현지에서 제작되었거나 플랑드르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성모 마리아의 생애와 그녀의 역할이 구약성서에서 어떻게 예시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대성당 보물에는 중요한 귀중품 컬렉션, 특히 성유물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중 일부는 프랑스 국왕의 대관식에 사용되었거나 대관식 때 군주들이 기증한 것이다. 여기에는 다음 유물들이 포함된다.

  • 성스러운 앰풀라 (Sainte Ampoule|생트 앙풀프랑스어): 프랑스 왕에게 기름을 부을 때 사용된 고대 성유물의 후계자이다. 프랑스 혁명 당시 파괴되었으나, 그 조각들이 현재의 플라스크에 보존되어 있다.
  • 샤를마뉴의 탈리스만 (12세기): 진실된 십자가의 단편으로 추정되는 것을 담고 있으며, 사파이어, , 에메랄드, 진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 생 레미의 성배: 클로비스의 대관식에 사용되었다고 전해지는 12세기 컵으로, 이후 대관식에도 사용되었다. 19세기에 진주와 보석으로 추가 장식되었다.


7. 800주년 기념

2011년, 랭스 시는 랭스 대성당 건립 8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열었다.[1] 기념 행사는 5월 6일부터 10월 23일까지 이어졌으며, 콘서트, 거리 공연, 전시회, 컨퍼런스, 그리고 야간 조명 쇼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었다.[1]

이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독일 예술가 이미 크노벨이 디자인한 6개의 새로운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이 2011년 6월 25일에 공개되었다.[1] 이 창문들은 총 128m2 면적을 차지하며, 대성당 내 샤갈이 제작한 기존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의 양쪽에 설치되었다.[1]

참조

[1] 웹사이트 Reims Cathedral page on culture.fr http://www.cathedral[...] 2016-07-17
[2] 서적 Gothic Architecture Yale University Press
[3] 뉴스 Reims Cathedral Burns http://mentalfloss.c[...] 2014-09-19
[4] Palissy buffet d'orgue
[5] Palissy buffet d'orgue
[6] 서적 パリの美術館で美を学ぶ ルーブルから南仏まで 光文社
[7] 서적 世界で一番美しい天井装飾 エクスナレッジ
[8] 웹사이트 フランス王に正統性を与えた地(ランスのノートルダム大聖堂、サン・レミ修道院、トー宮殿) https://www.keisen.a[...] 恵泉女学園大学 2013-08-02
[9] 웹사이트 晩年の藤田嗣治を追い、ランスへ https://allabout.co.[...] All Ab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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